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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근군 (楊根郡)
우선, 양근군(楊根郡)은 본래 양근군 또는 항양군(恒楊郡)이라 불렸으며(고구려시대) 다시 빈양현(濱陽縣)으로 고쳤고(신라시대), 후일에 옛 지명인 양근현으로 고쳐(고려) 조선시대까지 계속 불리어 왔으나 고려시대에 잠시 영화(永化) 또는 익화(益和)라고도 했다.

다음으로 지평군(砥平郡)은 지현군(砥峴郡)이라 불렸으며(고구려시대), 다시 지평군으로 고쳤다(신라시대). 지역의 수준급수가 감무에서 현(縣)으로까지 승격된 적도 있는 곳이다.

위의 두 연접지역이 1908년 9월 서로 합쳐 양평군이 되었다. 그 후 일제시대에는 주권이 상실되어 있었던 1914년 3월(甲寅年) 전국의 317郡 4,351面을 12府 218郡 2,517面으로 통폐합 조치한 강제령에 따라 양평군과 지평군이 합병되어 그 당시의 순수성을 담고 이어온 우리 민족의 고유한 지명들이 거의 말살된 채로, 두세 개 이상의 지명을 임의로 조작 합성어(合成語)가 되므로 써 양평군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 국토의 고유 지명은 구전(口傳) 또는 변음(變音) 속음화(俗音化)로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양평군은 산악·하천·평원의 세 유형이 어우러져 있으나 이 가운데 산악지대가 대부분의 주거지로써 경사지 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지명(地名)의 분포 역시, 산촌 경관을 모방하였다. 또한, 산악지형이 75.5%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고대에는 원시 무속적(巫俗的)인 문화의 양상이 삶을 지배하여 샤머니즘적 사상을 내포한 지명(地名)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중앙선 전철이 군의 동서를 가로질러 이어져 있으며, 서울과 강릉 사이의 국도(國道)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대부분이 직선으로 개설되었으며, 사방으로 연결된 지방도로 또한 포장이 잘되어 있다.

이러한 도로망의 구축으로 서울에서 1시간 이내의 근거리 지역 및 산수가 수려한 이점으로 전원주택마을이 점점 증가하여 산과 들의 형태를 바꾸면서 새롭게 남·북한강변을 중심으로 주거지와 근린시설 지역을 형성하여 형태가 완전히 변해 옛 지명의 속칭(俗稱) 의미가 달라짐에 따라 각 면(面)마다 지명(地名)을 고쳐진 경우도 적지 않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의 강제적인 통폐함으로 상중하, 동서남북, 시중종 등으로 편리하게 분류한 지명이 많으며, 양평군 관할이었던 남종면(南終面)이 광주군에 이속되었으며, 1942년 4월에는 설악면(雪嶽面) 또한 가평군에 이속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부분적이긴 하나 주민생활의 편리성을 고려하여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즉,

1963년 1월 여주군 관할이던 개군면(介軍面)이 우리 군으로 편입되었고,
1973년 7월에 서종면 삼회리(三會里)와 노문리(蘆門里) 일부가 가평군에 이속되었다.
1979년 5월에는 대통령령 제9409호에 따라 양평면이 양평읍(楊平邑)으로 승격 조정되었으며,
1988년 8월 중에 양평군 행정구역 조정 및 리··반(里統班) 설치 조례의 발효로 군내의 총체적인 개황은 양평읍 1개 읍(邑)을 위시하여 강상, 강하, 개군, 단월, 서종, 양동, 양서, 옥천, 용문, 지제, 청운 등 11개 면(面)과 110개 법정리(法定里), 248개 행정리, 760개 반(班)으로 형성되었으나,
2001년 관할구역재정비로 255개 행정리와 768개 반으로 개편되었다.

또한, 양근군(陽根郡)과 지평군(砥平郡)이 합쳐지기까지 그 동안 불리어 오고 있는 우리군의 지명(地名)에 관하여 이에 대한 호칭의 의미를 양근, 지평 읍지를 기준으로 하여 추측해 보고자 한다.


1. 양근군(楊根郡)의 지명은 고구려 시대에 근거를 둔 지명이다. 양근(楊根)은 버드나무 뿌리란 어원(語原)으로 짐작하건대, 남·북한강을 옆으로 끼고 둘러 있으면서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강변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또한, 홍수 피해에 대비하기 위해 제방(堤防)을 쌓고 버드나무(楊)를 심고 가꾸어 경관을 살리고 토사(土砂) 유실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지명은 현재의 갈산이나 양평교 부근의 양근리만을 두고 말하였다고는 보기 어렵고, 냇가 어디에나 버드나무(楊)가 자라 그 뿌리(根) 밑동이 얽혀진 채로 뻗어나 기초(基礎)가 튼튼한 고장에서 유래된 지명 즉 양제근기(楊堤根基)의 근원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2. 항양(恒陽)은 양근(楊根)과 같은 시대에 쓰여진 지명으로, 화창한 태양 빛이 변함없이 항상 비춰든다는 의미로 양지쪽의 만물은 계속 번창하여 가므로 더욱 살기 좋은 고장으로 보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음성에 비해 양성(陽性)은 그 근원이 진취적이며, 변화없는 영원성(永遠性)이라는 데에서 지명이 고정된 것 같다.


3. 빈양(濱陽)은 신라시대에 지어진 지명으로서 물가에 인접된 양지(陽地)라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주거지(집터)의 위치는 그다지 가리지는 않으나 시대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풍수지리설의 조건을 따르려는 습속(習俗)이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양지(陽地)쪽이고 식수(食水)와 농업용수가 잘 나는 유리한 곳을 반드시 갖추지 않으면 사람이 살아 갈 수 없었으므로 양평군내의 선사(先史) 유적지 출토지역은 대체적으로 강가에서 인접한 곳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4. 영화(永化)는 고려시대의 양근군 지명으로, 장구한 시간을 두고 덕(德)을 닦아가며 번창한 생활을 지속한다는 속뜻이 있다. 영생화육(永生化育)의 함축 어의(語意)가 있어 불교적인 면도 담겨져 있으므로 순박한 인심, 먼 장래까지의 영구함이 내포되어 있다.


5. 익화(益和)라는 지명도 양근군을 고려시대에 일컬었던 명칭이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화목하기를 더욱 유익하게 하는 고장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평화와 번영, 일익화창(日益和昌)의 선대인(先代人)의 속마음이 내포되었다. 당대에 의화군(宜和郡)이란 시호를 받은 김인찬이란 분이 양근 김씨의 시조(始祖)라고 전하고 있다.


이상 오늘의 양평군 전대(前代)의 지명을 살펴본 결과, 지정학적인 상징성이 아니라 군민(郡民) 전체에 대한 애향심과 미래지향적인 영원성으로 행복한 지역(福地)을 나타내고자 한 점이 확연하며, 편안하고 평화롭게 항구적으로 살아가는 고장이 되기를 희구(希求)한 명칭들로 되어 있다.
 
2. 지평군
양근군(楊根郡)과 합병한 지평군(砥平郡)의 지명은 지정학적인 연관에 의하면 상징성은 내포되지 않은 듯 하다. 고구려 시대의 지현(砥峴)이나 신라시대의 지평(砥平), 고려시대의 지제(砥堤)라는 지명은 이 고장 지산(砥山)에서 채석된 숫돌 생산지를 본따서 불린 것이며, 그 후대로 오면서 평지에 논농사를 짓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둑)을 쌓아 들판의 지형을 가꿔 온 선대(先代)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나타낸 지역 명칭이라 볼 수 있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아 양근(楊根)과 지평(砥平) 두 지역이 폐합되어 오늘의 양평군(楊平郡)이 된 경위는 그리 복잡한 변화는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겠다. 지금으로부터 90여년 전에 지평과 양근이 한 고장으로 합해진 이후 줄곧, 두 지역은 격동기의 시대를 겪어야 했던 우리 조상들의 희비애락이 산악 토양과 냇가 고을고을마다 서려 있음을 느끼게 되며, 순박한 인심 속에서도 국가를 위한 애국충심(愛國忠心)이 솟구친 지역이었다.

한편, 낙토(樂土)가 되기 어려운 가장 추운 산악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향해 달리는 지역민의 교통 중간 요지(要地)로 탈바꿈하여 예전의 ‘칡미포구’가 오늘날엔 어엿한 경관수려(景觀秀麗)한 남한강 물빛의 대교(大橋) 제1, 제2가 뻗쳐 그 위로 남한강종합수련원이 자리했으며, 양평군 전체를 굽어살피는 미지산(彌智山) 가섭봉(伽葉峯)과 백운봉(白雲峰) 등이 태백의 여세와 광주산맥의 큰 뫼 뿌리 그 정기(精氣)로 하여 872 평방킬로미터의 가장 큰 군세(郡勢)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오로지 수도권 전체 국민들의 식수원(食水源)이 되어 맑고 포근한 인심으로 감싸 안아 참고 화합하면서 쌀, 보리, 콩 등을 위시하여 감자, 옥수수, 배추, 무 심지어는 잣, 꿀, 산나물, 밤, 은행, 약초에 이르기까지 군민만을 위하지 않고, 전 국민을 향해 후덕한 배달민족(倍達民族) 속성을 이 시대까지도 버리지 않고 조용히 땀흘리며 살아가고 있는 양평 군민이야말로 실로 우리만의 자부심인 것이다.

옛 어느 문인(文人)의 찬시 중에 전해오는 ‘양평팔경(楊平八景)’을 잠시 기억해 본다.

白雲峯像
葛山勝景
南漢秋霧 三賢風月
梧桐津暮 鳳元遺陶
新白山獵 過倉穀垈

물론, 위의 예문(例文)외에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 양평군의 찬시(讚詩)는 더 있다.

이 곳을 다녀간 시인 묵객들의 붓끝 놀림에서도 자주 살필 수 있으며, 지역내의 각종 글을 짓고 쓰며 그림 또한 으뜸이다. 이러한 여러 문인들의 작품에서는 우리 고장 예찬의 문귀가 더욱 돋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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